[신기원 목요칼럼] 이방원과 수양대군

기사입력 2020.12.03 08:42 조회수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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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원(본 연구소 이사/신성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에는 성군도 있고 폭군도 있다. 또 존재감이 분명한 왕이 있는가하면 어머니의 그늘에 가려있거나 꼭두각시나 허수아비와 같은 왕도 있었다. 건강하게 태어나 장수한 왕이 있는가하면 병약하게 태어나거나 단명한 왕도 있었고, 적장자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경우도 있었고 서자나 천민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경우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가졌던 왕은 역성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경우와 형제나 친척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경우였다. 특히 이방원(태종)과 수양대군(세조)은 패륜적 행위를 하였지만 폭군이라고 하기 에는 지나친 점도 있어 역사적 평가가 갖는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방원과 수양대군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그들은 적장자1) 가 아니었다. 이방원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로 맏형인 이방우가 조선건국 1년 후에 죽자 후계자는 건국에 공이 큰 자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태조가 둘째 부인 강씨의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실망하고 분노하여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수양대군 역시 세종의 둘째 아들로 문무를 겸비한 자신이 후계자로서 더 적격이라고 생각했다가 형(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고 12세인 조카가 왕위에 오르자 야심을 드러내었다. 

 

 둘째, 왕위를 얻거나 보존하기 위해 형제나 조카는 물론 많은 신하들을 죽였다. 이방원은 조선을 개국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던 정몽주를 죽였고 아버지의 정치적 동업자이자 개국공신인 정도전도 죽였다. 또한 형제의 난을 통해 이복형제인 방번과 방석을 죽였다. 이에 반해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단종의 보좌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 인과 김종서를 죽였고 동생인 안평대군은 귀양을 보낸 후 사약을 내렸다. 또한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하여 집현전학자들을 죽여 사육신과 생신육이 생겨났으며, 동생인 금성대군 및 조카 단종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두 사람 다 권력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었다.  

 

 셋째, 문무를 겸비하였을 뿐만 형제가 왕위를 지냈다. 이방원은 조선시대 유일하게 과거에 합격한 임금이다. 그는 고려 우왕9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다음 해 문과 병과에 7등으로 급제한 인재였다. 또한 아버지와 함께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전과를 올린 무장이기도 하였다. 그는 1차 왕자의 난으로 정적들이 소탕되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심이 크게 동요될 것을 염려하여 둘째 형 방과(2대 정종)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가 3대 왕이 되었다. 한편 수양대군의 경우 유교경전은 물론 역법·병서에도 두루 통달했고 풍수 또한 전문가수준이었다. 음악이론과 악기연주에도 능하여 당대 어느 문사에게도 뒤지지 않는 학문적 소양과 교양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건강한 신체와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힘이 세서 강궁을 다루었다고 한다. 수양대군은 조카에게서 대임을 전수받아 7대 왕이 되어 형(5대 문종)과 함께 왕위를 누렸다.

 

 넷째, 왕권강화에 힘썼다. 태종과 세조는 의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고 6조직계제를 실시하여 신권을 약화하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였다. 또한 태종은 사병을 혁파하고 외척을 탄압하였으며 사간원을 독립하였다. 사실 태종이 권력을 쟁취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내 민씨와 처남들의 적극적인 헌신과 도움이 있었다. 그러나 태종은 외척의 힘이 강해지면 왕권을 강화하는데 문제가 생긴다고 판단하여 그들을 탄압하였다. 이밖에 충령대군을 세자로 삼은 후 사돈인 심온의 기세가 등등해지자 그를 제거하였다. 반면 세조는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하였고 애처가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이방원은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이복동생들을 죽이는 패륜을 저질러 아버지에게 미운털을 박혀 결국 부모와 자식이 원수가 되어 싸우는 조사의의 난까지 치르게 된다. 하지만 그는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친형 이방간을 죽이지는 않았으며 사간원의 직언을 불편해하기는 했지만 웬만하면 들어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유배를 보낸 후 다시 복직시켜 바른 말을 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또한 그는 조선의 왕 중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양위를 한 왕이며 성군 세종대왕을 탄생시킨 왕이다.

 

 한편 수양대군은 아버지인 세종이 돌아가신 후 친동생들을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으며 조카도 죽음으로 몰고 가 권력욕의 화신 같은 냉혹함을 보였다. 또한 공신들을 지나치게 우대하고 계속된 공신책봉으로 대토지를 소유한 특권층이 날로 늘어나 백성들의 부담이 늘어나게 했다. 이밖에 유향소와 집현전 및 경연제도도 폐지하였으나 경국대전을 편찬하고 군사부문의 편제를 완성하였으며 백성들이 수령에게 당한 억울한 점을 고소할 수 있도록 수령고소금지법을 폐지하였다. 또한 지속적으로 분대를 파견해 수령들의 비리를 감찰하였고 이후 백성들이 보복을 당하지 않도록 암행규찰단을 따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카리스마가 넘치는 독재자였음에도 신하들과의 관계는 잦은 술자리를 통해 친화력을 발휘하여 간극을 없앴다. 자신을 뽐내기도 좋아하였지만 신하들을 칭찬하는 데에도 인색함이 없었다. 그러나 본인이 경연을 폐지하고는 신하들 특히 성균관학생들과 무장들에게는 끊임없이 공부하기를 권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방원과 수양대군이 생존했던 조선 초, 유교국가의 명분을 내세워 개국했지만 왕권이 채 확립되기 전이라 왕조의 운명은 불안정적이었다. 형제와 친척 및 신하들의 피를 흘리게 하면서 까지 왕권에 집착했던 두 사람은 권력욕이 충만한 야심가들이었다. 집권 후 그들이 써내려간 역사가 집권과정을 정당화시켜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다를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권력 앞에 일가친척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권력은 야심과 정비례한다는 것이다.

1)  정실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첫째 아들.

[sbc서산방송 기자 sbc78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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