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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원 목요칼럼] 죽음에 관한 단상
[신기원 목요칼럼] 죽음에 관한 단상
신기원(신성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살아가면서 가장 두렵고 생각하기 싫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죽음은 생각만 해도 무섭고 공포스러운 단어이다. 하지만 현재 살아있는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어야 한다. 태어난 것이 필연이었다면 죽음 역시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생각하기 조차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가 유추하기에는 이 세상과의 단절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영원한 이별로 인한 안타까움,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이 세상에서 아직 무엇인가 할 일이 남았다는 아쉬움 등 때문일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동안 나름대로 피땀을 흘려 기반을 쌓아놓고 재미있게 살고있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정보도 없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 수 없는 저 세상으로 간다는 것은 모험이 아니라 극도의 불안감을 안겨주는 사건이다. 그리고 혈연관계든 연인관계든 또는 친구관계든 선후배관계든 다양한 정서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가져다준다. 또한 나이를 불문하고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현재에 충실하며 사는 것이 우리네 삶인데 갑자기 그것을 그만두는 경우가 생긴다면 얼마나 많은 미련과 아쉬움이 남겼는가. 하지만 우리가 희망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으로 초대받았듯이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죽음으로 인도되는 것이 인생살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계획적으로 치밀하게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정확하게 예상하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갑작스러운 손님이다. 이러한 불청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과제이다. 필자가 예전에 절절하게 불렀던 ‘백세 인생’이라는 노래가사를 보면 ‘구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해라, 백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라는 구절이 있다. 고령화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수명에 대한 속마음을 해학적으로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실제 저승사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각자가 선택해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얼마나 속 편하겠는가. 호스피스운동의 선구자이며 정신의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생수업’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죽음을 통보받으면 부정-분노-타협-절망-수용의 단계를 밟는다고 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수용의 단계까지 이르고 죽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죽음에 대해 부정이나 분노만 하다가 죽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타협하다가 또는 절망하며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는 것이 바람직할까. 어려운 일이지만 수용하는 것이다. 즉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반드시 죽게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야 평화가 온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내공이 필요한 것이다. 얼핏 생각하여 수용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포기가 죽음이라는 상황을 외면하고 등을 돌리는 행위라면 수용은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마주하고 정면으로 대응하는 행위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에 대해 절망하며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수용이다. 죽음을 수용하면 새로운 세상이 보일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이곳 지구에 와서 각자 개성 있는 삶을 살고 있듯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맞이한 죽음 이후에도 또 다른 무엇인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류가 오랫동안 고민했고 아직도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종교와문화를 만들었고 관습을 형성하며 미신을 낳았다. 이렇듯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각자 개개인 선택의 몫이다. 죽음 속에 묻혀서 죽음 같은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삶 같은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기고] 무엇이 중헌디...
[기고] 무엇이 중헌디...
서산시의회 의원 장 갑 순 다가오는 추석 명절을 앞두고 국민권익위원회가 "과도한 접대문화를 지양하고 민간영역의 청렴성과 직무 공정성을 향상하고자 한다"며 청탁금지법의 범위를 민간에까지 확대하는 ‘청렴 선물 권고안’을 추진해 국민들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청탁금지법으로 인해 애먼 농축수산업계만 큰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에서 민간에까지 그 범위를 확대한다면 그 피해는 불 보듯 뻔하다. 게다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농축수산업계가 아사 직전인 상황에서 이런 정책이 검토 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최근 여·야 할 것 없이 설날이나 추석 명절과 같은 특정 기간에 한해 농축수산물과 그 가공품에 대해서는 수수금지 품목에서 제외하거나 선물가액을 20만원으로 상향하자는 움직임이 큰 상황에서 정부 정책에 엇박자가 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기존 청탁금지법은 음식물(3만원), 경조사비(축의·조의금 5만원, 화환·조화 10만원), 선물(5만원·농축수산물 및 농축수산가공품 10만원)으로 상한액을 규정했다. 부정 청탁을 막자는 취지는 좋으나 엉뚱하게도 농축수산업의 피해가 가장 두드러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그 피해는 우리 농어민들에게 그대로 전가되었다. 궁여지책으로 지난 해 추석과 올해 설 명절기간 농축수산물의 선물가액 한도를 10만원에서 20만원으로 한시 상향한 바 있다. 그 효과는 확실했다. 선물가액을 20만원으로 한시 상향한 올해 설 명절기간에는 10만 원대 이하를 포함한 전체 농수산물 선물 매출이 56.3%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그 중에서 10~20만 원대 선물 소비량은 과일 13.8%, 축산물 21.6%, 수산물 24%, 기타 농산물 12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침체된 경기를 살린다며 수차례 곳간을 풀어서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는 상황에서 재정지출 없이도 재난지원금을 웃도는 경기부양 효과를 본 것이다.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농축수산물 소비촉진과 농어가 소득 보전을 위해 명절기간 만이라도 우리 농축수산물에 대한 선물가액 한도를 상향하자는 것이다. 아울러 명절 때마다 소모적인 논쟁을 하면서 농민들에게 불안감을 줄 것이 아니라 법 개정을 통해 명문화시키자는 것이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있다 부정청탁 잡으려다 농심 어심만 태우고 있다. 10만 원이면 청렴한 선물이고 20만 원이면 뇌물이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빈대를 잡으려거든 힘들어도 빈대만 잡아야할 것이다. 우리 농민 어민들이 피땀 흘려 수확한 농축수산물을 언제까지 ‘청렴’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1~2만 원 차이로 ‘선물’과 ‘뇌물’을 오가게 만들 것인가.
[기고] 위기의 인삼산업 탈출구는 없는가?
[기고] 위기의 인삼산업 탈출구는 없는가?
서산시의회 의원 안원기 지난 7월6일 충북지역 인삼농가들이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가격 폭락 대책을 위한 인삼농가 결의대회’를 열고 정부에 인삼산업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였다. 1970년대 후반까지 세계 인삼시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던 고려인삼의 서글픈 현주소다. 어떠한 이유에서 농부들이 삽자루 대신 시뻘건 현수막을 들고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시위를 해야 했을까? 농림축산식품부의 ‘2018년 인삼통계자료집’에 따르면 2018년 인삼 재배농가는 20,556호로 2010년 23,857호 보다 13.8%, 재배면적은 15,452ha로 2010년 19,010ha보다 18.7%, 생산량도 23,265t으로 2010년 26,944t보다 13.6%정도 줄었다. 반면에 수출량은 7,512t으로 2010년 3,712t 보다 102.3%나 늘었다. 8월 15일 기준 금산수삼센터에서 거래된 가격동향을 보면 수삼 10뿌리 기준 750g 당 3만원으로 지난해(3만7400원) 같은 시기보다 24.6%나 낮다. 재배면적과 생산량이 줄고 수출은 늘었는데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내부적으로 그 원인을 살펴보면 지속적인 재고량 증가와 소비침체에서 기인된 것이다. 수삼판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 인삼축제가 코로나 19 등으로 중단된 것도 수삼가격 폭락의 원인중 하나겠지만 소비자들이 수삼에서 홍삼으로 소비패턴이 변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이제는 수삼을 사와서 달이거나 꿀에 절여 먹으려 하지 않는다. 번거롭기 때문이다. 가볍고 간편하게 섭취할 수 있는 홍삼제품을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자들의 수요패턴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서 홍삼제품을 세분화해서 개발해야 한다. 소비 지출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MZ 세대 등 젊은 세대와 연령별 맞춤형 전략 제품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인삼의 가격폭락 원인중 하나는 재배물량의 정확한 수치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인삼가격 폭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생산량 예측의 불확실성에 기인한다. ‘인삼산업법’ 제4조[경작신고]를 보면 경작신고가 의무조항이 아닌 임의조항으로 되어있다. 이로 인해 전체 인삼 재배량의 30% 정도가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인삼 생산량의 수급조절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인삼경작신고의무제’가 시행되면, 2015년에 출범했지만 아직도 무임승차 논란이 많은 ‘인삼자조금’의 거출규모가 확대되고 집행도 원활해져 인삼산업 부흥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인삼산업은 인삼가격의 하락과 외국인 노동자들의 입국이 제한되면서 인건비가 상승하고 자재가격도 올라 삼중고를 겪고 있는 실정이다. 인삼의 종주국인 우리 대한민국 인삼산업이 벼랑 끝에 몰려있는 지금 정부당국과 국회의 많은 관심과 적극적인 대처로 다시 한 번 전 세계에 우뚝 설 수 있는 인삼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신기원 목요칼럼] 장애인 탈시설정책에서 간과한 것
[신기원 목요칼럼] 장애인 탈시설정책에서 간과한 것
신기원(신성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몇년전 제자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지인 중에 장애아가 있는 부부가 있는데 맞벌이라 경제사정상 도저히 부모 중 한사람이 장애아를 돌보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장애인거주시설에 맡기려고 했더니 시설에서 안받는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보기에 정원에 비해 현원이 부족한데도 충원을 안하는 것을 보니 기부금이라도 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나에게 얼마를 내야하는지 알아봐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해당장애인시설 원장을 만나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 원장은 펄쩍 뛰면서 장애인탈시설정책을 언급하였다. 즉 정부의 탈시설화정책 때문에 결원이 생겨도 제도적으로 거주인(장애인)을 충원할 수 없는 것이지 기부금을 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전국장애인거주시설부모회에서는 지난달 26일에 이어 지난 10일 세종시에 위치한 보건복지부 청사 앞에서 “장애인복지법을 개정해 장애인거주시설의 신규설치를 금지하겠다고 하는 것은 엄연한 위법행위이며 선량한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살인행위”라면서 “장애인과 부모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정부의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을 즉각 철회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또한 “정부는 중증발달장애인이 시설에서 거주할 권리를 보장해달라”면서 “정부가 탈시설 로드맵을 실행하려면 중증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의 안락사도 함께 허용하라"며 울부짖었다. 이들은 거주시설에 있는 장애인들의 현황을 올바로 파악한 후 장애인과 부모들이 현실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애인탈시설정책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정부가 가장 소홀하게 여긴 부분은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과 그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부모들의 의견을 듣지 않은 것이었다. 사실 장애인탈시설을 주장하는 입장에는 여러 부문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주장으로는 장애인의 인권에서부터 시작하여 지역사회를 통한 재활과 자립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장애인인권과 관련해서는 00복지원사건과 같이 장애인시설에서 학대와 착취 및 인권유린이 일어나다보니 장애인시설은 인권사각지대를 의미하는 용어처럼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장애인시설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장애인을 학대하는 사람이고 시설장은 당연히 학대의 주범으로 비춰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시설은 절대적으로 악이기 때문에 탈시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장애인당사자주의를 강조하며 장애인의 선택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탈시설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러한 입장은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흑과 백으로 명명백백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드물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사회의 편견과 차별 그리고 자식을 시설에 맡긴 부모들의 사정과 상황 및 장애아의 상태를 무시하고 쉽게 탈시설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먼저 한국에서 인권침해나 차별을 가장 많이 받는 집단이 장애인(2019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실시한 국가인권 실태조사 결과)이라는 것이 밝혀질 만큼 장애인은 우리사회에서 무시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장애아를 둔 부모들은 장애아를 키우면서 정신적·육체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는다. 심지어 주간보호센터 같은 이용시설에서도 거절당하고 거주시설에도 입소하지 못해서 집에 머물고 있는 중증발달장애인들도 많다. 이들 부모들은 주위에서 쏟아지는 민원으로 이사를 수없이 다녀야만 했으며 심지어 장애아와 함께 죽어야겠다는 생각도 하였고 일부 부모는 실행에 옮기기도 하였다. 시설이 가정보다는 못하지만 호구지책으로 의사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중증장애아를 시설에 맡겨야 하는 부모에게 누가 돌을 던질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런 상황을 겪고 시설에 겨우 아이를 맡기고 나서 이제 경제적으로나 심리사회적으로 조금 안정을 취한 부모들에게 정부의 탈시설정책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다. 뒤늦게나마 장애아를 시설에 보낸 부모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장애아의 장애정도와 상태를 확인한 후 부모들이 안심할 수 있는 탈시설정책을 만드는 것이 포용국가를 표방하는 정부의 자세이다. 이런 부분을 꼼꼼하게 챙기지 않으면 정부는 설익은 탈시설정책, 무늬만 탈시설정책을 만드는 꼴이 된다.
[신기원 목요칼럼] 法治와 人治
[신기원 목요칼럼] 法治와 人治
신기원(신성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민주주의가 발달한 서구 선진제국들이 법과 제도를 통해서 인간의 무한한 권력욕과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제한한 반면,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했던 동양사회에서는 지도자 개인의 인격수양과 교육에 의존하였다. 따라서 법치주의보다는 덕치주의가 더 강조되었다. 법에 따라 정책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지도자보다 덕에 기초하고 솔선수범하는 지도자가 동양사회에서는 성군으로 기록되었다. 법이나 제도에 의존하기보다 지도자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권력을 이해하고 그 폐해를 줄이려고 노력했던 전통이 어느 의미에선 더 진보된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제도보다 인간을 강조하는 전통은 폭군이 출현했을 때 절대적인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포악한 지도자는 항상 법을 초월하는 존재로 그를 제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해방이후 우리나라에서 최고권력자들이 보여준 권력행태는 대부분 국민을 무시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일관되는 특징이 있다. 지도자 본인은 법을 위반하고 무시하면서 피치자인 국민에게는 법이나 질서 지키기를 강요하거나, 법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수단이 아니라 통치와 억압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권위주의적인 독재자의 모습은 군부출신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때론 민주화운동출신의 지도자들에게서도 발견되었다. 군부출신들은 목표달성을 앞세우고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조직문화에 길들여져서 그런 것 같고, 민주화운동을 하던 지도자들은 독재정권에 맞서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독재방식에 길들여져서 그런 것 같다. 지도자들이 그렇고 그런 자리에 앉으면 이런 행태가 지도자 개인이나 주변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쳐서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국정을 책임지는 자리를 앉게 되면 국가와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쳐 때론 국정운영을 경직되게 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정부에 대해 저항하게 하는 원천을 만든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을 잡으면 이를 국민들을 위해서 잘 쓰기보다는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마음껏 휘두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이런 모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또한 조직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과거 동양에서는 인간의 이러한 심성을 파악하고 국가의 경우 왕자들을 교육하고 인격수양에 힘쓰도록 하였다. 또한 성인들은 修己治人할 것과 小人이 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서구의 민주주의제도를 받아들였지만 한동안 왜곡되고 파행적으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실질적으로 최고지도자들이 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에 따라 민의가 반영되어 선출된 것은 1980년대 후반이후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본격화된 것은 불과 반세기가 채 안되고 그 이전에는 군부가 무력을 동원하여 권력을 찬탈하다보니 군대식의 무리한 방법들이 국가전반에 파급되었다. 이렇게 권력을 잡은 이들을 모두 똑같이 평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 중 어떤 이는 수기치인과 소인이 되는 것을 경계하고 국정운영에 몰두하여 역사적으로 일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은 재임 중은 물론 퇴임 후에도 ‘지 멋대로’의 행태를 보임으로써 국민들을 수치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몰염치하다고 생각하는 지도자들은 ‘인격수양 불량과 지도자로서의 교육부재’로 인치는커녕 법치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국정을 난맥상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현대 민주국가에서 법치가 강조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법치를 토대로 민주주의적 이념을 제대로 교육받고 이를 실천에 옮겼던 인사들이 국민의 선택을 받아 국정에 참여하는 환경이 조성될 때 우리나라도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대선후보로 나서고 있는 인물중에 동양적 인치의 전통과 서양의 법치를 조화시킬 수 있는 정치지도자는 과연 누구인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를 통해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아지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기고] 제8대 서산시의회 마지막 행정사무감사를 마치며...
[기고] 제8대 서산시의회 마지막 행정사무감사를 마치며...
임재관 시의원 정책이란 공공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나 지방정부의 활동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권력과 힘이 있는 결정권자의 머리에서 “이거 한번 해볼까?”라고 뚝딱 결정해서 추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정책은 사회문제가 이슈화 되면 이것이 공중의제로 확산하면서 공감대가 형성될 때 제도권의 의제로 설정되고 정책의 결정, 집행, 평가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국가나 지방정부의 의도와 활동을 나타낸다. 민선7기를 맞은 서산시에서는 그동안 이해할 수 없는 정책들이 추진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1000억여 원의 시민혈세가 투입되는 서산시 수석동 도시개발사업 정책이 그렇다. 도시개발사업 주체인 시는 도시개발사업을 농업진흥지역이 포함된 구역을 환지방식부터 부동산 투기적 거래가 있기까지의 정책추진은 물론이고, 개발사업자가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마련하는 토지인 체비지 분양이 안 될 경우, 다시 말해 체비지를 인수할 매수인이 없으면 일단 서산시가 체비지를 매입하여 보유한다는 것이다. 그로인한 매월 수십억의 금융이자 비용은 우리 시민이 부담해야하는 상황이다. 또한 서산비행장 민항건설, 해양산업과 문화가 공존하는 해양산업클러스터 육성, 가로림만 해양정원 조성사업 역시 그렇다. 시는 2019년 11월에 조직개편을 하면서 상설 3국인 시민생활국, 건설도시국, 자치행정국과 한시적 조직인 신성장사업단을 경제환경국, 복지문화국, 건설도시국, 자치행정국 상설 4국으로 개편했다. 시민생활국의 해양수산과와 신성장사업단의 항만물류과를 해양수산과의 항만물류팀(4차산업)으로 통합해서 수산행정(1차산업)과 동일 부서에 편성하는 조직개편을 단행한다. 기존 항만물류과의 물류정책팀, 항만팀, 항공철도팀을 교통과의 항공철도물류팀으로 개편했다. 이런 조직 개편은 서산시가 환황해권 벨트의 중심 도시로서 문화관광산업을 선도하고 미래의 역동적인 도시로 나아가는 데 역행하는 조직개편으로 볼 수 밖에 없다. T/F를 조직하고 전문가를 영입해서라도 미래 산업에 대응하는 전문부서를 강해해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조직을 사분오열 시켜놓고 담당부서나 시장은 동분서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시가 이런 식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일머리가 없는 것이고, 행정과 정책을 꼬여버리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효과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정책형성에서부터 분석, 결정, 집행, 평가의 과정에서 시뮬레이션과 피드백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절차에서 정책, 행정, 법률은 서로 필수불가결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신기원 목요칼럼] 서번트리더십 다시 보기
[신기원 목요칼럼] 서번트리더십 다시 보기
신 기 원(신성대 사회복지과 교수) 바야흐로 대권도전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여기저기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스무명을 넘는다고 한다. 직전대통령들이 교도소에서 콩밥을 먹고 있는 상황인데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줄을 선 것을 보면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좋긴 좋은 자리인 모양이다. 출마의 변을 토해내는 후보들을 보면서 서번트리더십이 떠올랐다. 서번트 리더십은 그린리프(Robert K. Greenleaf)가 저술한 ‘Servant Leadership’에서 유래된 것으로 한때 변화무쌍한 21세기에 적합한 리더십 중 하나로 주장되었다. 그는 서번트 리더십은 ‘타인을 위한 봉사에 초점을 두며, 종업원, 고객, 및 커뮤니티를 우선으로 여기고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헌신하는 리더십’이라고 하였다. 경영학계의 귀재인 드러커(Drucker)도 ‘Managing for the Future’에서 지식시대에는 기업내에서 상사와 부하의 구분도 없어지며, 지시와 감독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리더십패러다임도 서번트 리더십으로 전환될 것을 암시하였다. 봉사적 리더십 혹은 섬김의 리더십으로도 불리는 서번트리더십은 표현이 갖는 상징성으로 말미암아 종교적 영역 특히 기독교의 사목을 담당하는 지도자들에게 적합한 리더십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서번트리더십은 경영학계는 물론 일반사회에서도 회자되고 있고 효과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속한 조직이나 주위의 조직 혹은 사회일반의 조직에서 발견되는 리더십은 어떤 유형의 리더십인가? 서번트리더십이 발휘되고 있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리더의 문제일까 아니면 상황이나 조직의 특성 때문일까? 리더십과 관련하여 자질론, 행동유형론, 상황이론이 있다. 자질론이란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생래적 속성이 있다는 입장이다. 행동유형론은 지도자의 행태분석을 통해서 성공적인 지도자들이 보이고 있는 리더십행태를 밝히고자 하는 입장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 등 자질보다는 지도자들이 실제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상황이론은 리더의 개인적 속성이 아니라 상황이 지도자를 만든다는 입장으로,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이유는 그가 지닌 생래적 속성 때문이 아니라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적합한 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번트리더십은 이러한 이론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또 조직의 특성에 따라 이러한 요인들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 것일까? 먼저 공공조직과 민간조직의 경우를 비교해 보면 서번트리더십은 공공조직에 적용하기가 더 쉽다. 왜냐하면 공공조직 특히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단체장들이 주민들의 직접선거를 통해서 4년마다 선출되기 때문에 재선을 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민심을 존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오너가 있는 기업의 경우 자기가 회사를 차렸고 내 맘대로 운영하겠다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서번트리더십을 택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이처럼 민간기업이 서번트리더십을 택하지 않는 이유는 리더가 갖는 속성과 관련이 있다. 권위주의문화가 강한 한국의 풍토에서 자수성가한 기업가의 경우 독특한 성향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독특한 성향으로 사회화됐을 가능성이 높다. 굳이 부하의 의견을 듣거나 비판적 입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간섭당하는 것 같아서 듣기 싫고 귀찮기 때문이다. 듣지 않아도 잘되고 있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식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 주변에는 대개 예스맨만 모인다. 상황이 그렇게 조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조직의 생명력은 짧아질 것이다. 역사상황에 따라 효용성을 발휘하는 리더십의 유형도 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공정과 정의가 절실한 이 시대에 어떤 리더십이 필요할까.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어떤 특성을 지녔고 이름을 떨친 과정은 어떠하였으며 그들이 속한 문화는 어떠했을까. 또 후보로 나선 리더 주변에는 어떤 인물들이 포진해 있을까. 그들은 과연 서번트리더십의 위력을 실감해 봤을까. 후보로 나서는 사람들을 보며 드는 생각들이다.
[신기원 목요칼럼]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것
[신기원 목요칼럼]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것
신기원(신성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나는 동물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이다. 그러다보니 집에서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것은 물론 병아리나 새, 물고기를 키우지 않았다. 자폐아인 막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십여년전 아는 분이 막내에게 정서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며 수족관을 선물해서 물고기를 잠깐 키운 것이 유일하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친구들 집을 방문하고 나면 꼭 이런 저런 종류의 애완동물을 키워보자고 무던 졸랐지만 나와 아내는 언제나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필자의 경우 부모님이 미곡상을 하셔서 작전상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다. 예전에는 쥐들이 많았고 쌀을 대개 가마니에 넣어서 보관하다보니 쥐들이 쉽게 구멍을 내서 쌀이 가마니에서 흘러내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쥐들과의 전쟁에서 고양이는 필수품이었다. 그러고보니 포식한 고양이의 살찐 모습과 새끼고양이들을 거느리고 다니던 어미고양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또 한번은 갓 태어난 고양이를 안고있다가 쥐가 나타나서 고양이에게 보여주니 이를 본 쥐와 새끼고양이가 둘 다 놀래서 도망치는 희한한 경우도 봤었다. 그랬던 새끼고양이도 얼마 안가 쥐들의 공포대상이 되었다. 가끔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피해 아침나절 산책 삼아 동네를 돌고 있다. 피곤하지 않을 정도로 돌고 오면 1시간 남짓 걸린다. 그런데 며칠 전 개 때문에 공포를 느껴 산책을 계속하여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사정은 이렇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10여 미터 앞에서 큰 개가 숨소리를 가쁘게 내면서 내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오고 있었다. 마스크를 하고 모자를 쓴 내 모습이 개의 관심을 끈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개의 가쁜 숨소리에 긴장이 되었다. 또 비교적 큰 몸집도 나를 쫄게 만들었다. 나는 방어할 무기가 아무 것도 없었다. 개 주인이 “이리 와”라고 소리를 질렀는데도 금방 말을 듣지 않았다. 사납게 생긴 큰 개를 눈앞에 두고 무심하게 걷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개는 주인에게로 갔다. 개 옆을 지나는데 땀이 물 흐르듯 하였다.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개 주인에게 욕을 퍼붓고 이단옆차기를 날리고 싶었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된다. 그게 사람 살아가는 도리이다. 본인은 동물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똑같지는 않다. 내가 동물을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그 동물을 사랑해줄 수 있게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가끔 호수공원에서 산책을 하다 보면 작은 강아지에게 온갖 예쁜 장식을 해서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정말 귀엽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배변에 대한 대처를 하지 않아서 주위의 눈총을 받는 경우가 많다. 저만 좋다는 이기적인 행동이다. 아니 몰상식한 것이다. 어느 소방관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한번은 “애가 화장실에 빠졌어요”라는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를 받고 출동해서 가봤더니 재래식 화장실에 강아지가 빠져있었다. 화가 나서 ‘왜 거짓말을 했냐’고 했더니 나이든 부부가 강아지를 가리키며 진지한 표정으로 “저 강아지가 우리 집에서는 애여요”라고 하였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절박한 표정으로 말하는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져 결국 똥통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나중에 보니 그 집에는 진짜 자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느 교수는 늦둥이 때문에 개를 키우는데 개 이빨 교정비용으로 수 십 만원이 들어갔다며 개 키우는 비용이 애 키우는 비용과 똑같다고 하였다. 강의 나오는 어느 교수는 텅 빈 집에 쓸쓸하게 들어가는 것보다는 자기 발자국소리를 듣고 짖어 주는 개라도 한 마리 있어야 노년에 덜 외롭다고 하였다. 애완동물이라는 명칭이 인간위주이고 동물을 오직 수단으로 삼는 것 같다고 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이란 의미의 반려동물로 바뀌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도 주변에서 그 의미를 실감할 수 있도록 기본을 지켜야 할 것이다.
[신기원 목요칼럼] 결혼식에 대한 단상
[신기원 목요칼럼] 결혼식에 대한 단상
신기원(신성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요즈음 결혼식에 참석하며 느낀 공통점은 결혼식이 이제는 예식이 아니라 이벤트로 변했다는 것이다. 흔히 결혼식은 남녀가 부부관계를 맺는 서약을 하는 의식으로 혼례식(婚禮式) 또는 화촉지전(華燭之典)으로 불린다. 결혼식이란 배우자 양쪽의 선택에 대해 가족이나 사회가 승인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배우자와 자녀의 행복에 평생 마음을 바쳐 힘쓰고 책임을 다하는 일에 따르는 어려움과 희생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받아들인다는 것을 공표하는 것이다. 결혼한 지 삼십년이 넘은 이 시점에서 주례를 보기 위해 결혼식에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출석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혼주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고 얼른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신랑이나 신부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빨리 식사를 하고 자리를 비워주는 것도 혼례를 치르는 측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참석했던 몇몇 결혼식에서는 부득이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일이 생겨 요즘 결혼식의 진풍경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신랑이 신부에게 축가를 불러주는 모습은 기본이었고 신랑이 신부를 안고 앉았다 일어날 때 마다 신랑은 ‘나는 봉이다!’ 신부는 ‘나는 봉잡았다!’를 외치게 하기도 하였다. 다른 결혼식장에서는 결혼식 중간에 신랑과 신부의 어렸을 적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둘이 만나서 결혼하기까지의 사진을 편집해서 스크린으로 보여줬다. 아이디어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결혼식장에서는 사회자가 “신랑이 신부를 잘 키워줬다고 장모님에게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며 장모님을 앞으로 나오게 했다. 선물은 다름 아닌 장모님에 대한 신랑의 섹시한 볼 뽀뽀 세 번!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사회자가 “시아버지가 서운할 것 같다”며 며느리에게 신랑처럼 똑같이 하라고 하였다. 현직 교장선생님인 시아버지는 엉거주춤한 상태로 며느리의 볼 뽀뽀를 기다렸다. 시아버지에 대한 며느리의 첫 번째 뽀뽀가 끝나후 두 번째 뽀뽀를 기다리던 시아버지를 향해 사회자가 그만 들어가시라고 하자 시아버지는 무안해 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결혼식은 하나의 이벤트가 되고 있었다. 일생에 한번뿐인 결혼식을 천편일률적으로 치루기 보다는 특별하게 기록하고 싶다는 젊은세대의 취향이 적극 반영된 것 같다. 또한 자기를 축하하러온 하객들에게 무엇인가 서비스하고 싶다는 신랑신부의 바램도 담긴 것 같다. 결혼에 관한 기록을 보면 고대에는 자기 부족이나 집단하고만 결혼하는 내혼제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 특히 왕실에서는 족내혼(族內婚)이 성행하였다. 외부 집단과 교류가 제한되어 있던 경우 이런 식의 결혼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가 점차 복잡해지고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외부집단 출신과 결혼하는 외혼제가 정착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법제상 동성부취(同姓不娶)가 철칙이었으며 ‘월삼성육촌(越三姓六寸)해야 혼인할 수 있다‘는 관행이 일반화되었다. 또한 결혼에는 상징성을 띤 의식절차가 포함되었는데 보통 종교에서 신성한 것으로 규정하는 이 의식들은 신혼부부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절차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무엇보다도 다산과 관련이 있었으며 씨족이나 인종,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결혼의 중요성을 인정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를테면 자녀를 많이 갖도록 해주는 다산의식은 모든 결혼식에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는데 오늘날 결혼식에서도 간혹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의식으로는 신부가 어린이를 들러리로 세우는 것이 있다. 사모관대를 한 신랑과 족두리에 연지곤지를 찍은 신부의 전통혼례가 그립기는 하지만 오늘날 이벤트화된 혼례의식을 되돌릴 수는 없다. 다만, 이벤트화 되는 결혼식 풍속도가 빠른 결별로 연결되어 ‘이혼의 이벤트화’로 전락하지 말고 신랑신부가 알콩달콩 정담을 나누며 일상생활의 어려움도 거뜬하게 극복하는 지속가능한 결혼생활로 발전하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