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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그 후] 서산태안지역 4.15총선 비하인드 스토리 - 국가혁명배당금당 김미숙 후보 편
[선거 그 후] 서산태안지역 4.15총선 비하인드 스토리 - 국가혁명배당금당 김미숙 후보 편
치열했던 4.15 총선이 막을 내린지 일주일이 흘렀다. 21일 SBC서산·TBC태안방송에서는 선거기간에 남은 아쉬움을 털어버릴 수 있도록 각 선거 캠프의 일원을 만나 선거의 준비과정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 기호 7번, 국가혁명배당금당의 김미숙 후보 선거캠프에서는 타 후보들과 다르게 후보자가 직접 인터뷰에 응해 선거의 아쉬움과 성과를 돌아봤다. 김미숙 후보는 선거 이후 장애인 활동 도우미와 개인 카페운영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는 중에도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김미숙 후보는 이번 선거운동을 돌아보며 선거 당시 따로 보좌진이 없어 개인적으로 바쁜 일상을 보냈음에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알리지 못한 사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어 타 캠프 중 부러운 점이 있었는가를 묻는 질문에 대해 대의원, 시의원 선거를 많이 경험한 인맥이 있는 미래통합당 성일종 후보의 캠프를 꼽았다. 그러면서 경험 있는 인재들과 함께한 성일종 후보의 캠프는 당선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보전금을 전부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부럽다고 전했다. 김미숙 후보는 개인의 사비로 이번 선거를 진행한 만큼 이번 선거의 목적인 공약을 알리는데 많은 성과가 있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어 유튜브를 통해 자신이 국가혁명배당금당에 빠지게 된 계기, 사회 전반으로 퍼져 있는 유용한 공약들에 대해 소개하면서, 허경영 국가혁명배당금당의 대표의 여러 말 중 ‘효(孝)’ 사상을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로 꼽았고,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전하며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후보자의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해 묻자 본인 스스로도 공약에 대한 실천방법까지 정확히 파악해 한 사람에게라도 명확히 이해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이날 SBC서산·TBC태안 방송의 조한구 자문위원장, 김문호 운영위원장을 비롯한 여러 자문·운영위원들이 자리를 빛내며 인터뷰를 참관했다. 이번 인터뷰는 유튜브 ‘서산태안방송’에서 영상으로 시청이 가능하다.
[선거 그 후] 서산태안지역 4.15총선 비하인드 스토리 - 정의당 김명래 조직팀장 편
[선거 그 후] 서산태안지역 4.15총선 비하인드 스토리 - 정의당 김명래 조직팀장 편
SBC서산방송은 21일 ‘선거 그 후’시리즈를 기획해 정의당 김명래 조직팀장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서지영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인터뷰에서 김명래 팀장은 지난 4.15총선 결과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김명래 팀장은 정의당 신현웅 후보에 대해 ‘사회적 약자’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선거에서 어려웠던 점에 대해서 미래통합당 성일종 후보와 더불어민주당 조한기 후보의 치열한 각축전이 있는 와중에 신현웅 후보에게 끊임없이 단일화 요구가 이어진 점을 꼽았다. 김명래 팀장은 이번 4.15총선 과정에서 타 선거캠프와의 정의당 선거캠프를 비교해서 강점과 부러웠던 점을 각각 묻는 질문에 대해 “부러웠던 점으로는 조직력과 선거를 운용할 때 필요한 비용”이라고 말했으며 정의당 캠프의 강점으로는 “‘자발적인 선거운동원’들의 단합과 참여”라고 답했다. 이어 김명래 팀장은 21대 총선 사전여론조사결과에서 비교적 낮은 지지율을 받았던 것에 대해 “겸허한 마음으로 시민의 요구를 수용했다”고 답하면서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김명래 팀장은 인터뷰 막바지에 시청자들에게 “국민들이 정의당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번 기회에 좀 더 냉철하게 성찰해보고, 양당에 대한 피해의식은 떨쳐버리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답하면서 “중앙당(정의당)의 문제점들을 혁신하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는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인터뷰에는 SBC서산방송 김문호 운영위원장, 조한구 자문위원장, 김응권 자문위원 등도 자리를 함께했다. 더 자세한 인터뷰 내용은 SBC서산방송 ‘선거그후’ 인터뷰 시리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신기원 목요칼럼] 방생
신기원 목요칼럼] 방생
신기원(신성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방생이란 다른 사람 혹은 본인이 잡은 물고기·새·짐승 따위의 생명이 있는 것들을 산이나 못(저수지)에 놓아 살려 주는 일로 살생의 반대말이다. 방생은 사람의 목숨이 중요하듯 다른 생물의 목숨도 다 같이 소중하기 때문에 생명을 구제해야 한다는 것으로 생명존중사상의 실천이자 생명의 존엄성을 깨우쳐 주기 위한 가르침이다.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 추구하는 근본적인 이념이다. 하지만 방생행사를 대부분 절에서 주관하는 것은 불교의 경우 방생식을 부처님이 강조한 자비사상을 실천하는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살생을 금하는 것이 소극적인 선행이라면 방생을 실천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쌓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방생은 적극적으로 권장되고 능동적으로 실천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행사위주의 방생 말고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생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필자는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는 것, 고아와 무의탁 노인을 보살피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 무분별한 개발로 황폐해진 자연을 되살리는 행위 등도 넓은 의미의 방생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방생의 본질은 이타주의에 있기 때문이다. 즉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입장으로 행동의 목적을 다른 사람의 행복에 두는 것은 방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타주의적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로는 철학자이자 음악가였으며 의사였던 슈바이처를 들 수 있다. 그는 일찍이 아프리카로 건너가 원주민을 위해 의료봉사활동을 벌여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아프리카 밀림의 성자’로 불렸다. 슈바이처는 청년시절 “서른 살까지만 나를 위해 학문과 음악을 하고 그 이후에는 인류를 위해 봉사하자.”라는 결심을 하고 철학박사학위와 신학박사학위를 차례로 받은 후 인류를 위해 봉사를 하려면 우선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다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뜻에 감동하여 헬레네라는 아가씨도 슈바이처를 돕기 위해 간호사 공부를 하였다.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슈바이처는 헬레네와 결혼한 뒤 1913년에 아프리카 가봉으로 가서 원주민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렇게 10년, 20년이 지나자 슈바이처의 노력은 세상에 알려졌고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고, 또 함께 봉사를 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도 생겼다. 슈바이처가 의술을 통해서 사람을 살렸듯 우리는 방생을 통해서 동물을 살리고 그런 행위를 통해 자연을 살려야 한다. 자연은 동물만 사는 곳이 아니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이자 교육론자였던 루소의 언명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그것은 필연이자 운명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높은 권력을 차지하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어도 생명을 잃는 순간 이 모든 것을 지구상에 내려놓아야 한다. 육체를 이 세상에 버리고 영혼은 바람처럼 정처 없이 저세상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 자연과 환경, 더 나아가 모든 생명을 중시하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자연을 살리는 활동은 나를 살리는 활동이고 가족을 살리는 활동이며 이웃과 사회 그리고 지구를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방생의 올바른 의미는 생명구제와 자연생태계보호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생활 속에서 이를 실천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소유욕이나 집착 그리고 근심과 걱정을 방생하고 마음의 평정과 가족의 행복 그리고 사회의 안녕을 소망하며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지속가능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은 거창한 구호와 요란한 활동 속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방생에 대한 각별한 인식과 꾸준한 실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방생에 대한 교육과 실천적 노력이 병행된다면 보다 빠르게 문화국가로 갈 수 있을거라 기대해 본다.
[인터뷰]김기재 당진시의회 의장 “열린 의회, 일하는 의회 정착 시키겠다
[인터뷰]김기재 당진시의회 의장 “열린 의회, 일하는 의회 정착 시키겠다
김기재 당진시의회 의장(더불어민주당)은 “열린 의회, 일하는 의회를 정착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새해 각오를 다졌다. 그러면서 원칙을 바로 세우는 균형 잡힌 의회를 운영하고, 동료 의원들과는 소통과 협치를 통해 민주적인 방향으로 의회를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시민과 집행부, 의회가 상생 할 수 있는 의정활동을 추진하겠다” 는 그를 만나 앞으로의 의정활동 등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은 김 의장과의 일문일답. 1. 의장 취임 후 6개월이 지난 소회가 어떤가. 제 3대 당진시의회가 출범한지 6개월이 지났다. 이 시간동안 집행부에 대한 엄격한 견제·감시와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는 등 의회 본연의 책무를 다하는데 노력했다. 힘든 성찰의 순간도 있었지만 시민께서 보내주신 과분한 관심과 사랑 앞에 늘 겸손하면서 우리사회의 소외되고 응어리진 부분에 대해 우선적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한 시간들이었다. 앞으로 13명 시의원 모두가 본연의 사명과 책무를 더욱 충실히 이행하는 것은 물론, 시민행복과 당진발전을 위한 든든한 동반자가 될 수 있도록 열정을 다하고 싶다. 2. 취임 후 큰 변화가 있었다면 무엇일까. 당진시의회는 시민들이 바라고 염원하는 것에 확실한 변화를 주기위해 그동안 노력해왔다. 먼저 시민들이 시의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 13명의 시의원들이 서로간의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하며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구체적으로 ‘열린 의회를 만들자’라는 계획으로 당진 시 14개 읍면동에서 각 지역구로 활동하는 의원들이 시민들에게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도록 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냉정한 평가를 받는 게 당진시의회의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이라고 정했다. 당선자는 개인의 비전과 계획을 가지고 출마했지만 어떤 선출직이든 유권자가 선택을 해준 사항이다.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 위임 받았기 때문에 그 일들을 잘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에서 ‘확실한 변화, 열린 의회, 일하는 의회’ 라는 슬로건하에 지난 6개월의 시간 동안 하나씩 준비했다. 3. 2019년 의정활동 계획과 운영 방향은? 지난 6개월이 제3대 당진시의회가 가야할 방향을 생각하고, 제시하는 시간이라면 앞으로의 여정은 시민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일하는 의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당진시의회는 과거 권위적인 관공서의 이미지를 탈피해 시민과 시의원간의 소통을 넓혀 나가겠다. 2019년은 당진시의회를 시민들에게 환원하자란 생각으로 변화를 주고 싶다. 우선 정례회와 임시회 등의 의사일정과 활동 등을 SNS로 실시간 생중계하며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의회의 의사진행상황 등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실질적인 열린 의회를 구현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또한, 시의회 청사를 상시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1층 도서관, 2층 북 카페, 3층 스터디 룸 등을 마련해 시민들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다. 올해 전반기 세부 계획을 완성하면 공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당진시의회는 시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시민의 뜻이 시정에 잘 반영 될 수 있도록 역할을 다 하는 것이 올해 가장 큰 목표이다. 4. 시민들에게 새해 인사를 전한다면? 지난 한해 당진시의회가 한층 성숙된 의회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시민 여러분이 보내주신 관심과 성원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모든 의정활동의 중심에는 시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항상 시민과 대화하고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다양한 여론을 수렴하겠다. 또한 여론을 바탕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등 적극적인 의정활동을 펼쳐 나갈 계획이다. 시민여러분도 우리 의회가 초심을 잃지 않도록 조언을 아끼지 말고, 끝없는 관심과 아낌없는 성원을 부탁드린다. 새해 시민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에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고, 소망하는 모든 일들이 성취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신기원 목요칼럼] 탄생의 비밀
[신기원 목요칼럼] 탄생의 비밀
세계 3대 심리학자로 프로이드와 융 그리고 아들러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정신역동이론을 주장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프로이드가 있다. 프로이드와 이들의 관계를 보면 융은 프로이드의 뒤를 이을 황태자로 칭해졌고 프로이드의 영향으로 국제정신분석학회 초대 회장이 되었으나 그의 이론을 비판하며 관계를 단절하였다. 아들러는 정신분석학자로서 프로이드와 교류하며 비엔나 정신분석학회장까지 맡았으나 인간을 보는 관점에서 프로이드와 이견을 보이면서 강한 적대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융에 의해 분석심리이론이 나오고 아들러에 의해 개인심리이론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세 학자의 탄생 및 성장과정에서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이드의 어머니는 본인보다 무려 20살이나 많은 남자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 결혼 당시 전처가 낳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본인 또래였다. 모종의 성적인 긴장관계가 추론된다. 실제 프로이드는 성인이 된 후 자신이 이들 간 관계에 대해 가지는 환상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또 프로이드가 세 살 되던 해 두 이복형들이 영국으로 이민을 간 후 10여 년간 프로이드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다섯 명의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따라서 프로이드와 어머니 사이에는 여느 모자지간보다 더 강한 심리적 애착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된 것이다. 한편 프로이드는 비엔나 의대를 졸업한 후 신경과 의사로 활동하면서 히스테리 환자들에게 자신이 고통받는 이유를 자유롭게 말하도록 한 것이 환자증상을 이해하는데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인간의 의식 저편에 무의식이 우리를 움직인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인간을 움직이는 대표적인 에너지는 성적인 욕망과 공격적인 욕망이라고 하였다. 이와 달리 융은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목사였으나 변덕스럽고 짜증을 잘 내는 성격이었고 어머니는 정신질환과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 융이 3살 되던 해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융은 어린 시절을 아버지와 함께 보냈다. 여동생이 태어났던 9살까지 융의 유년기는 외롭고 불행하였다. 이런 경험을 가진 융은 프로이드의 열렬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엄마에 대해 에로스적 욕망을 담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융의 친가와 외가에는 목사, 의사, 영매 등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았다. 융의 조부와 조모 그리고 모친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강하게 믿었고 아버지를 포함한 세 형제는 모두 목사였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융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자신의 꿈을 통해 무의식이 자신에게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 또한 인류조상들의 경험을 통해서 형성된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을 집단무의식이라고 처음 주장한 것이나 집단무의식은 신화, 예술, 꿈. 환상 등에서 발견되는 원형적 이미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는 난해한 주장을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의 연장이다. 아들러는 태어날 때부터 구루병이 있었으며 후두염, 폐렴 등을 앓아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5살 때 폐렴에 걸렸을 당시 의사가 부모에게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만약 살게 된다면 커서 꼭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결심은 어린 시절의 경험 자체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각하고 활용하는 개인의 주관적 방식과 결정에 따라 삶은 가변적인 수 있다는 것으로 프로이드의 결정론과는 입장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한 안과의사로 일하면서 그는 시력이 저하된 사람들의 청력이 매우 민감하게 발달하는 것을 발견하고 열등감과 보상이라는 핵심개념을 정립한다. 의사로 수년간 활동했던 그는 프로이드와 교류하면서 제자가 아니라 동료라고 생각했고 정신분석도 받지 않았다. 이후 그는 프로이드가 성적 욕망에 지나치게 천착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갈등을 보였고 끝내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학회를 따로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정신역동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만남과 헤어짐은 새로운 이론을 탄생시켰는데 그 근저에는 학자들의 탄생배경도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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